좋은 칼럼

[스크랩] 어우동은 누구인가?

허당1 2010. 10. 16. 18:21


세조3년 정귀덕이라는 명문가의 여인이 의금부에 구속되었다.
죄목은 집에서 부리던 노비를 때려죽인 혐의였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상류사회의 화젯거리가 되었는데
당시 사대부가의 마나님이 구금되는 일도 드문 사건이었지만
사건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면서 순식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마침내 실록에 까지 수록되는 영광(?)을 누렸다.

정귀덕의 남편 박윤창은 상주박씨로 그의 집안은 조선초의 신흥가문에 속했다.
박윤창의 삼촌 박안신은 태종때 승지를 지냈다고 하는데
박윤창 본인은 세종 11년 과거에 급제하며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는 세종의 유명한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의 실험,실측사업에 참가하였는데
그 공을 인정받아 사간원 우헌납에 발탁되었다.

하지만 더이상 승진하지는 못하고 관직도 중간정도였고
가문은 신흥가문이었지만 집안의 재산이 넉넉했다고 한다.
여기에 부인 정귀덕의 집안도 상당한 부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몹시 거칠고 안하무인격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박윤창은 눈을 다쳐 애꾸가 되었는데 정귀덕은 부부싸움을 할때면 남편에게 애꾸눈이라고 말하고 더 화나면 손에 장대를 잡고 집의 처마기와를 때려부수기도 했다고한다. 집안의 하인이 조그만 실수를 해도 고문을 가했고 죽은자도 여럿이었다고 하니 그 성격을 짐작할수 있으리라 본다.

그런데 집안에 체격이 장대하고 잘생긴 남자하인 한명이 있었는데 정귀덕과 모종의 관계였던 모양이었다.
같은 집안의 한 여종이 이 사실을 알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니 정귀덕은 즉시 그 모녀를 때려죽였고 이일로 의금부에 갖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인에게 그렇게 무시를 당하며 살던 박윤창은 의금부로 찾아가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절하게 부인의 무죄를 탄원하였고, 박윤창의 이 놀라운 순애보는 다시한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다행히 마침 대사령이 내렸고 증거도 불충분하여 정귀덕은 석방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어쩌면 있을수있는 한가정의 일과성 해프닝이라고 할수있었다. 하지만 19년후 이 가정은 다시한번 매스컴을 타면서 당시 조선사회를 크게 놀라게 하였고 결국 실록에 다시 한번 수록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박윤창과 정귀덕부부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다.
딸은 성장하여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 되었다. 총명하고 글공부도 해서 시를 짓고 감상할줄도 알았다.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도 언문밖에 몰랐고 그 시대의 대갓집 마나님 중에는 한문은 고사하고 언문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던점을 고려하면 박윤창의 딸은 출중하다고 할수 있었다.
또 춤과 악기,노래도 수준급 이었다.
성격은 알수없는데 아마도 모친을 닮아 굳세고 당찬 스타일이 아니었나 싶다.

어미가 드세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미인인 데다가 공신가문의 부호집 딸이었으므로 그녀는 종친인 태강수 이동과 결혼했다.
이동은 세종의 둘째형 효령대군의 다섯째 아들의 서자였다.
태강수나 황진이의 시에 등장하는 벽계수를 이름이나 호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태강과 벽계는 양녕대군,효령대군에서의 양녕이나 효령과같은 명칭이고 수는 대군,군에 해당하는 관직의 호칭이었다.

종친은 능력을 불문하고 친족관계에 따라 관직을 받았는데
왕비의 소생은 대군,후궁의 소생은 군이고 그 아래로 정,수,영 등의 관직이 있었다. 이가운데 수는 정 4품의 관직이었다.

이동부부는 딸 하나를 두었으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성종 7년 이동은 부인을 딸과 함께 소박하여 친정으로 내쫓았는데 이 여인이 바로 어우동이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보통 어우동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록에는 어을우동으로 더 많이 표기되어 있다. 어을우동은 원래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의 음만 한자로 옮긴것으로 원래 이름은 얼동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훗날 뭇남성의 사로잡는 미모의 어우동을 태강수 이동은 왜 소박을 놓았을까. 이부부의 파경에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이동이 연경비라는 기생을 사랑해서 억지로 어우동의 허물을 잡아 쫓아내었다는설과 어우동이 집에 은그릇을 만들려고 찾아온 은장이와 간통을 해서 이동이 쫓아냈다는 설이다.
그런데 성종실록 7년 9월의 판결에 따르면 이때 어우동의 간통사는 무죄였다.

이동은 첩에게 빠져서 함부로 부인을 버린죄로 삭탈관직을 당했고, 부인과 재결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동은 이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종친이었던 이동은 몇개월뒤 관직을 되찾았고, 어우동은 법적으로는 이동의 부인이지만
실질적으로 소박을 맞은 기묘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쫓겨난 어우동은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당시 부친 박윤창은 이미 사망했거나 모친과 이혼했던거 같다. 어우동의 모친 정귀덕 역시 늘 주변사람 누구와 지속적으로 바람을 피운다는 의심을 받았고 그때문에 박윤창이 이혼을 결심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친정으로 돌아온 어우동은 무척 낙담하여 탄식과 눈물로 날을 새우며 살았다고 한다. 이시대의 사대부여인이 재혼을 하는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혼녀가 재혼해서 자녀를 낳을경우 그 자녀는 관직에 오르기 힘들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재혼자체가 불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정부는 이동이 잘못했다고 판결을 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어우동은 엄연히 이동의 부인이었다. 한마디로 재혼의 길이 막힌것이다.

게다가 20세기에서나 발견되는 유전의 법칙을 훨씬 오래전부터 굳건히 믿었던 당시 사람들은 바람기가 많은 어미와 그 딸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았고 이런경우 사람들은 대개 법원의 판결보다 소문을 더 믿게 된다. 게다가 집안이 안되려는지 모친과 오빠인 박성근의 사이가 안좋았고 박성근부부도 싸움이 잦았다.

이렇게 우울한 환경속에서 한숨을 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우동에게 어느날 한 여종이 다가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야사에 의하면 이 여종도 주인 못지않는 미녀였고, 대단히 남자를 밝히는 여자였다고 하는데 그후 의기투합한 둘의 행적을 보면 이 여종도 상당한 기질(?)을 갖고있는 여성이었다.
여종의 제시한 새로운 삶의 방향은 다름아닌 동거할 파트너를 구해주겠다는 것이었고 그 첫번째가 사대부 집안의 훤칠한 용모로 소문난 오종년이라는 인물이었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절망에 빠졌을때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는 남자들을 심심찮게 보게된다.
반대로 생각해서 실의에 빠졌던 어우동이 여러 남자를 만나며 자신의 한(?) 많은 신세를 잊고자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하기를 바란다.

암튼 이때부터 어우동의 화려한(?) 외출이 시작되었다.
실록에서는 어우동의 외모와 나이에 대해서 한마디의 언급이 없다. 이것이 그녀를 매혹적인 절세의 미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대개 자신을 기녀로 위장해서 남자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배려를 해주었다.조선시대가 여인의 정조를 중히 여기는 시대였다고들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대부 여인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천한 여인들의 정조는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관기를 흔히 길가에 핀 꽃이라 불렀다.아무나 꺾을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우동과 동시대를 살았으며, 훗날 어우동의 재판에 승지로 참여했던 성현은 자신의 저서 <용재총화>에 이 시기 그녀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

-태강수에게 쫓겨난후 어우동은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였다.계집종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잘생긴 소년을 끌어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못해 둘이서 번화가로 돌아다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누구는 나이가 젊고 누구는 코가커서 주인에게 바칠만 합니다" 하면 어우동은 "모는 내가 맡고 모는 네게 주리라"라고 말하면서 웃고 즐다.-

오종년이후 어우동에 의해 선택을 받은 남성들 중에는
남편 태강수와 마찬가지로 종친이었던 방산수 이란, 수산수 이기, 요즘으로 말하면 의학부 학생이었던 전의감 생도 박강창, 일반 평민이었던 이근지,내금위소속의 구전, 성균관 생원 이승언,정 9품의 관직에 있던 홍찬, 서리 감의향,
노비 지거비 등이었다.

이 어우동 리스트(?)에 나타난 남자들의 신분은 조정 고위관료부터 천민까지 천차만별이었고 직종도 다양했다.
어쩌면 어우동은 이 리스트때문에 더 유명해졌다고 할수도 있는데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을 잠시 살펴보면 방산수는 왕실족보나 기타 문헌을 뒤져보아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아마 어우동 사건으로 족보에서 삭제되어
버린것 같다. 아마도 그가 뒤에 어우동 리스트를 공개한 인물이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방산수는 어우동의 남편 태강수와도 친분이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어우동의 신분을 알면서 관계를 가진듯 하다.

수산수 이기는 태종의 형 정종의 서자인 석보정 이복생의 손자였다. 이승언은 고려시대 이후 명문가의 소생이었다.
결혼도 잘해서 그의 장인은 효령대군의 친손자이며 세조의 총애를 받아 이조참판까지 지냈던 춘양군 이래였다.
많은 종친중에서도 실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당시 이승언은 장안의 사교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귀공자였다고 한다.
그냥 내가 이생원이다 라고만 해도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것이 그는 성균관의 수석 입학자 였으며 사림파의 종주로 추앙받는 김종직에게도 글을 배웠다. 또 장수가 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활쏘기를 잘했다고 한다. 집안 내력으로 보건대 문무를 겸비한 체격크고 힘도 센 호걸형 이었던거 같다. 놀기도 잘해서,악기,노래솜씨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배경좋고 실력좋고 잘생기고 잘 노는 못하는것 없는 차세대 유망주였다.

종9품의 관직 학록에 있던 홍찬역시 장원급제를 한 수재로 집안도 좋고 활도 잘 쏘아 이승언과 함께 최고의 인재로 평가받고 있었고 나중에 성종이 주위를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기회를 주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어우동 리스트의 인물들이 신분,지위고하가 다양한것처럼 이들을 만나고 사귄 사연또한 다양했다.
풍류남 이승언,김의향은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어우동의 미모를 보고 따라갔다가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길가던 미시족에게 한눈에 반해 헌팅을 한 케이스 라고나 할까.

수산수 이기는 춘향전의 이도령처럼 단오날 어우동의 그네뛰는 모습에 반해서 넘어갔고, 박강창은 노비를 사러 어우동 집에 들렀다가 어우동의 유혹에 넘어가서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홍찬은 어우동이 홍찬이 장원급제하고 지나갈때 창틈으로 엿보고 점찍었다고 하는데 요즘 영화의 한장면처럼 홍찬이 다니는 길을 알아두었다가 일부러 부딪혀서 인연을 만들었다고 한다.

야사에는 어우동의 미모뿐 아니라 잠자리에서의 능력(?)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사실여부는 확인할수 없지만 정황으로 보건대 남자들을 사로잡는 무엇인가가(?) 확실히 있었던것 같다.

점차 어우동의 행적이 장안의 풍류남들을 통해 소문이 돌자 나중에 스스로 그녀를 찾아오는 바람둥이들도 많았다.
평민이었던 이근지는 어우동의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와 사통한 케이스다. 지금으로 말하면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하던 군인이었던 구전은 어우동의 옆집에 살았는데, 어느날 어우동이 혼자 정원에 있는것을 보고
내금위의 용사답게 담을 뛰어넘어 돌진하여 그녀를 안았다.

천민이었던 지거비는 밀성군 이침의 종이었는데,
밤길을 나서는 어우동을 가로막고 자신과 동침하지 않으면 행적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하여 소원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많은 남자들 중에서 어우동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는 박강창과 방산수, 감의향 이었다고 한다.
어우동은 박강창과 방산수는 팔에, 감의향은 등에다가 자기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어우동이 모친을 닮았다면 상당히 도도하고 지배욕이 강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자존심이 태강수 이동에게 버림을 받으면서 크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고 그녀의 화려한 남성편력과 이름을 새기는등의 행동은 심한 불안감과 왜곡된 지배욕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위에 기록된 인물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어우동과 관계를 가졌다.
더욱 놀라운것은 당시 고위관료였던 어유소,노공필,김세적,김칭,김휘,정숙지등도 어우동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종역시 어우동의 소문을 듣고 몰래 어우동을 찾아가 관계를 가졌다는 야사도 있는데 사실이 아닌듯 하다.
나중에 재판을 통해서 고위관료들은 성종의 배려(?)로 석연치 않은 이유를 통해 유야무야 빠져나갔다.

어쨌건 어우동의 이런 화려한 시절(?)은 4년이나 계속 되었고 장안의 어떤 남성도 어우동이 유혹의 손길을 뻗으면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16세기의 서울은 적어도 인구가 10만으로 추산되는 국제적으로도 큰편에 속하는 도시였다.
그리고 인맥으로 얽힌 상류사회의 사교계는 좁고 소문도 빨랐다.

성종 11년 6월 방산수 이란이 의금부에 체포되었다.
누가 고발을 했고 어떻게 행적이 들통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죄목은 유부녀와의 간통죄였다. 어우동은 기생이 아니고 사대부가의 딸이었고,법적으로 엄연히 왕실의 여인 이였기 때문이다.

방산수 이란의 체포소식에 놀란 어우동은 도망쳤으나 곧 붙잡혔다.
처음에는 종친사회에서 일어난 간통사건 정도로 여겨졌으나,
방산수의 입에서 이시애난의 영웅 어유소, 노사신의 아들 노공필, 건주여진을 정벌하여 이름을 날린 김세적,
효자로 소문나 나중에 효자비까지 세워지는 김칭, 김휘,정숙지,이승언,홍찬등 당대의 걸물이름이 줄줄이 나오면서 희대의 스캔들도 번졌다.

어우동의 처리를 두고 조정에서는 3개월동안이나 격론이 벌어졌는데 어우동의 죄목이야 당연히 간통죄였다.
조선시대에 종이 사대부의 여인과 간통한 경우가 아닌이상 간통죄의 형벌에는 사형이 없었다. 의금부에서 최대로 높여서 올린 형량은 장 100대에 2천리밖 유배였다. 그러나 강경론자들은 어우동의 경우는 특별한 케이스이니 극형을 내려서 뭇 사람들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했고
반대론자들은 어떤 경우라도 법전에 없는 형량을 부과해서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이때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당시 성군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재판결과를 보고받을때 항상 형량을 한단계씩 낮추어서 결재하던 성종이 어우동의 극형에 적극 찬성하고 나온것이다.
성종은 심지어 노비주제에 왕가의 여인을 협박하여 간통한 지거비까지 사형에서 두단계나 낮추어 유배형도 아닌 강제사역형인 도형으로 판결하고
그나마 보석금만 내고 석방시키는 광용을 보여주면서 (나중에 대신들의 반대로 유배를 보낸다) 어우동에게만은 초강경 자세를 유지했다.

성종의 이런 모습은 폐비윤씨사건과 신숙주의 아들 신정사건이 거의 유일하다.
성종은 왜 이토록 어우동을 죽이려고 했을까?
흔히 말하기는 조선시대는 경색되고 남성 중심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사실 어우동이 죽어야 할 배경에는 정치적 이유가 개재되어 있었다.
어우동의 리스트에 나온 인물들의 대부분은 성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인물들이고, 개인적인 약점이 있거나 가문배경,성향 때문에 관료군의 견제와 비난을 많이 받는 존재들이였다.
이들은 당시 20대 중반의 성종이 앞으로 친정을 펼칠때 기존의 관료세력에 대항해 기대를 갖고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있던 친위세력이었던 것이다.

방산수와 어우동이 형벌을 모면하고 물타기를 하기 위해서 국왕의 측근들과 총애받는 유망주들을 불었다면
그것은 완전한 오산이었다. 성종의 입장에서는 아찔할 정도로 놀랐을 것이다.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디선가 나타난 한 창녀같은 여인이 나타나서 자신이 오랫동안 섬세하게 조정에 심어놓은 친위세력을 하루아침에 뒤흔들어 놓은 셈이었다. 그녀가 살아있는한 어유소등은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어느날 그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더 큰 문제였다.

게다가 성종은 왕가의 여인이 숱한 사람들(고관을 포함해 천민까지)의 하룻밤 상대가 되었다는것에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여인이 왕가의 여인임을 알고도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성종은 겉으로는 점잖았지만 속으로는 무척 자존심이 강한 왕이었다.
또 온 백성의 사표가 되어야 할 왕실로써도 창피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어유소등을 계속 추국하여 진상을 밝힐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성종 자신에게 더욱 큰 손실을 가져올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성종이 분노를 발산할수 있는 대상은 이 모든일을 초래한 이 매혹적인 여인 뿐이었다.

그리고 성종의 우려대로 어우동 리스트의 유망주들은 그뒤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전도양양하던 이승언은 문관직에 진출하지도 못한채 무반인 선전관직을 얻는것에 그쳤다.
본인은 어우동이 사대부의 여인인줄 몰랐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 그가 무척이나 안되었는지 <추강냉화>에서는
그가 의금부에서 나의 무죄는 하늘이 아실거라고 말하자
갑자기 하늘이 검어지고 폭우와 우박이 쏟아졌다는 이야기를 번듯하게 실어놓았지만 그의 벼슬길은 그걸로 끝이었다.

홍찬은 이승언과는 달리 성종이 나중에 사헌부 감찰로 임명했다. 감찰이 된다는건 관계의 엘리트코스로 진입하는걸 의미했다.
다음에 사헌부나 사건원의 언관직을 거치고 육조의 낭관을 거치면서 승지가 되고 판서가 되고 정승까지 갈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간들이 끝까지 어우동 스캔들을 물고 늘어져서 좌절되었다.
성종은 홍찬의 재주가 아까웠지만 정 6품인 평안도의 병마평사도 겨우 임명했다.
나중에 홍찬은 여진족의 기습을 받고 만포진과 벽동을 약탈당했는데 그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어났고 그의 관운도 여기까지였다.
용감했던 구전은 무장이어서 어우동의 후유증을 덜 겪었다.
여진정벌에 참가하여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고,성종의 신임으로 회령부사와 온성부사를 역임했고 나중에 중종조에 의주목사까지 승진했는데
그때도 어우동의 연인(?)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성종 11년 10월 18일 장안의 사람들이 한 여인을 보기위해 의금부, 지금으로 말하면 종로구 공평동 154번지 제일은행 본점부근에 모여들었다.
어우동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던 문제의 그 여종은
어우동을 실은 수레가 의금부문을 나서자마자 수레로 뛰어들어 두손으로 어우동의 허리를 잡았다.

무언가 격려의 말은 해주어야 겠는데, 감정이 격한 그 상황에서 무슨말이 쉽게 나올수 있었을까. 다급하게 하는 말이 "주인께서는 넋을 잃지 마소서, 이런 역경을 겪지 않으면 어찌 다시 이보다 더 큰일을 할수 있겠습니까?" 였다. 주변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우동이 죽음의 길을 가는동안 누구는 욕을했고, 누구는 비웃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쉬워했다.
어우동을 마음으로 점찍어두었던 남성이 있어서 였을까,
너무 과도한 형벌을 받는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 있어서 일까,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형을 집행한 장소는 지금의 서울시청 부근이었고 사형방법은 교형이었다.

형장에 모인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조금후면 전설이 될 여인의 목에 밧줄이 감기는것을 보았다.
잠시후 양쪽으로 선 두 집행인이 밧줄을 잡아당겼다.
당대 최고의 조선풍류남들을 마음껏 유혹하며 농락했던 그 매력적인 육체가
조여드는 고통에 잠시 요동을 치다가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후 어우동의 이름은 왕실족보에서 삭제되었다.
그녀의 모친 정귀덕 또한 친정과 시댁의 족보에서 삭제되었다.
하지만 이 가정의 불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우동이 죽은후 모친 정씨는 어우동이 남긴딸 번좌와 아들 박성근일가를 데리고 음죽현으로 이사를 갔다.
주위의 눈때문이라도 더이상 한양에서는 살수가 없었을 것이다.

8년의 세월이 흐른 성종 19년, 음죽현에서 정씨가 살해되었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성종치세의 평화로운 시대였으니만큼 양반가의 여인이 살해당하는 일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정부는 양근근수 이의형에게 범인을 색출하게 했는데, 놀랍게도 범인은 아들 박성근 이었다.

직접적인 살해동기는 모친의 재산이었다고 한다.
아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정귀덕은 토지와 노비를 조금밖에 떼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박성근이 가난했던것도 아니고, 박성근과 공범을 했다는 종들도 확실한 자백을 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진술은 박성근의 조카이자 어우동의 딸인 번좌가 했다.
하지만 박성근은 끝까지 부인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정귀덕은 남편뿐 아니라 아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딸인 어우동을 끝까지 변호하고 어우동이 남긴딸 번좌에게 잘해준걸 보면 그녀는 남편과 아들에게는 가혹하고 딸은 편애했던거 같다.
이런 가정환경속에서 박성근 역시 정상적으로 컸을리가 없다.
결국 모자사이의 누적된 불만이 모친살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것이다.
박성근을 최조하는 과정에서도 조정관리들은 또한번 놀라게 되었다.
박성근의 부부사이도 원수처럼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금부에서 박성근이 매를 맞으며 죽어가고 있을때, 그의 아내는 남편을 향하여
"너는 마땅히 빨리 죽어야 한다"고 소리치며 욕을 했다고 한다.
자신은 공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유교적 사고관의 조정관리들은 이 놀라운 모습에 몹시 충격을 받았다.
보다못한 조정관리들은 성종에게 가서 박성근과는 별도로 이 여인을 처벌하자고 건의했다. 이역시 보기드문 경우이다.

결국 박성근은 범행사실을 자복하지 않은채 고문을 당하다가 의금부 감옥안에서 죽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노비신분으로 떨어져 토지와 재산을 빼앗기고 북쪽 변방으로 강제 이주 되었다. 어우동의 딸 번좌는 그뒤로 행적을 알수가 없다. 아마도 그녀역시 그리 행복한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차례에 걸쳐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박씨가문은 끝이났다. 완전히 망했다는 말은 이런경우에 쓰이는가 하는것처럼 말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이 집안처럼 가정문제로 실록에 자주 등장하고 2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세상을 놀라게한 일가도 없었다.

어우동의 이야기는 영화와 소설로도 많이 만들어지고 쓰여졌다.
어떤이들은 어우동을 시대에 대한 저항을 한 여인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예술의 영역에까지 간섭할수야 없겠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녀는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성장하고 결혼을 잘못한것이 이런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교훈정도가 남는다고 하면 너무 잔인한 말이 될런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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