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칼럼

왕조실록 열람논란

허당1 2013. 8. 2. 07:13

 

태종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져 말에서 떨어졌다.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그러나 이 발언 자체가 그대로 <태종실록> 태종 4년(1404) 2월 8일 기사로 실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세종 13년(1431)에 <태종실록>이 완성되니, 세종이 읽어보고 싶었다. “춘추관(春秋館)에서 <태종실록> 편찬을 이제 다 마쳤으니, 내가 한번 보려고 하는데 어떤가?”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등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만일 보신다면 후세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실록을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도 임금이 볼까봐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진실을 전하겠습니까.” 그 해 3월 20일의 <세종실록> 기사다.

 

세종은 20년(1438) 3월 2일에도 <태종실록>을 열람하고자 했으나 반대에 부딪혔다. 미련이 남았는지 세종은 이틀 후 춘추관에 명하여 태종이 <태조실록>을 열람한 적이 있나 없나 상고하여 아뢰도록 했다. 선례를 찾아본 것이다. 그러나 태종도 열람한 적이 없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이 없게 된다

 

<실록>의 기초자료인 사초(史草)도 열람이 금지되었다. 사초에는 사관이 국왕의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입시(入侍) 사초와 정리하면서 평가를 적은 가장(家藏) 사초가 있었다. 이 사초가 연산군 때 정쟁거리가 되었다. 김일손에게 불만이었던 이극돈 등이 그의 사초를 문제 삼았다.

 

연산군이 전교를 내렸다.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안으로 들여오라!” 이극돈 등도 이 전교를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 “예로부터 사초(史草)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초의 6조목만을 잘라 봉해서 올렸다.

 

연산군이 쫓겨난 후 즉위한 중종도 <실록>을 열람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간원에서 반대했다. “<실록>의 개폐를 엄밀히 해야 한다는 뜻은 먼 장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성(慈城)을 혁파한 근본 원인을 상고하는 일로 <실록>을 열람하고자 하나, 한번 그 단서를 열어놓으면 훗날 폐단이 끝이 없을 것이니, 용이하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실록>은 기록자의 주관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선조실록>을 보면, 북인의 지도자인 조식의 졸기(卒記)는 22줄(한 줄에 대략 26자)의 분량이다. 반면 라이벌이었던 이황의 졸기는 단 두 줄에 걸쳐 기록했다. 더 심한 것은 이이의 졸기였다. “이조판서이이졸(吏曹判書李珥卒).” 그러니까 이조판서 이이가 ‘죽었다’는 딱 한 가지 사실을 ‘졸(卒)’이라는 딱 한 자로 기록한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다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했다. 이이의 졸기는 36줄로 늘어났다. 남인이 주도한 <현종실록>에 대해 서인은 <개수실록>을 편찬했다. <숙종실록>에 대해 소론은 <보궐정오>를 덧붙였고, <경종실록>에 대해 노론은 <수정실록>을 따로 편찬했다.

                                                                                                  

                                                                         왕조실록열람과 논란(다산연구소 연구원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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