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칼럼

[스크랩] 득량의 소리...

허당1 2007. 7. 15. 12:43
 

/이용한(시인) 사진/안 홍범(사진가)

 


이곳 없었으면 충무공도 없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성군은 충무공 이 순신 장군이 겪었던 가장 극적인 순간의 사연이 서려 있는 고장이다. 임진왜란을 지나 정유재란 때 충무공이 군량과 군기, 수군과 배를 얻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나라와 백성을 구할 기틀을 마련한 터가 이곳이라 한다. 그때 장군은 지금의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 마을에서 군량을(마을 뒤 언덕에 충무공이 군량을 얻었다는 식량 창고인 조양창 터가 남아 있다), 보성의 군기고에서 무기를, 회령면에서 수군을, 회령포에서 전선 열두 척을 얻어 울돌목 앞바다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난중일기>를 비롯한 몇몇 기록에 따르면, 충무공은 백의 종군에서 풀려 전라도로 내려오게 되자 보성에서 열흘 동안 머물며 다시 싸울 준비를 다졌다고 한다. 정유년(천오백구십칠년) 팔월 열나흘 밤 장군은 보성읍 열선루에 올라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며 시를 읊었다.

       한가로운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이 칼과 활을 비추는구나.

득량면 비봉리에는 "선소"라고 불려 오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장군은 이곳에서도 배를 모아 갔다. 본래 선소는 조선 명종 때부터 변방의 방어를 위해 배를 만들고 수군을 두어 바다를 지키던 곳이었다. 말하자면 병선을 만들던 조선소였던 셈인데, 그 땅 모양을 보면 마을의 서편으로 바닷물이 산밑 깊숙이 들어와 저수지처럼 되어 있어 언뜻 보기에도 배를 만들기에 더없이 알맞은 곳 같다. 그때 조선소로 사용했던 자리에 지금은 방파제가 들어섰지만, 방파제 밑에 긴 통나무 조각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것이 혹시 병선을 만들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선소가 있는 "득량"이란 땅이름도 충무공이 보성 앞바다 득량도에서 콩과 벼를 실어 냈다고 하여 "식량을 얻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보성에서 충무공이 다시 일어설 발판을 마련했다면, 그이를 도와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군 대장 최 대성 장군과 충무공에게 승전의 계략을 전해 주었던 안 중묵은 보성이 키워 낸 인물이다. 최 치원의 후손이기도 한 최 대성은 충무공이 백의 종군하고 있을 때에도 보성에서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마련하여 충무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충무공에게 다시 일어설 발판을 마련해 준 장본인이 그이였던 셈이다. 득량면 송곡리에 가면 "군머리"라는 곳이 있는데 그이가 두 아들과 함께 왜군을 섬멸하다 순절한 곳으로서 후세 사람들이 그이를 기려 붙인 땅이름이다. 성리학과 천문, 지리에 능했던 안 중묵은 병법에도 밝아 충무공이 왜적을 물리칠 계략을 그이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이는 <삼국지> 한 질을 내주면서 이 책에 표시한 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며 세 개의 비책이 적힌 비단 주머니를 함께 주었다. 그 도움 덕이었는지 충무공은 열두 척밖에 안 되는 배로 삼백 척이 넘는 왜군 선단을 쳐부술 수가 있었다. 보성이 아니었으면 충무공이 다시 일어설 수 없었고, 최 대성 장군과 안 중묵 선생이 없었다면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역사가 길고 깊은 "보배로운" 곳

보성군은 전라남도의 남쪽 가운데께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순천시, 남쪽은 고흥군과 득량만에 닿아 있고, 서쪽은 장흥군과 화순군에 붙어 있다. 군의 모양은 대체로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삼각형의 윗모서리에서 소백산맥의 두 지맥이 팔자 모양으로 팔을 벌려 동서 양쪽의 군 경계를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고, 그 사이를 보성강이 흐른다. 보성군에는 마치 말똥말똥하게 뜬 두 눈처럼 선명한 두 개의 중심지가 있다. 서쪽의 중심은 보성읍이고 동쪽의 중심은 벌교읍이다. 보성읍이 동서의 통로와 북쪽으로의 통로를 가진 삼거리 모양의 교통 중심지라면 벌교읍은 동서와 남북으로 연결되는 사거리 형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보성읍이 웅치, 회천, 득량, 노동, 미력, 겸백, 율어, 복내, 문덕까지 아우르는 행정과 경제 생활의 중심지로 발전한 반면, 벌교읍은 조성과 낙안, 고흥군의 동강, 남양, 대서와 어울려 가까운 시군들을 배후로 하여 성장하였다. 따라서 보성은 대내적인 중심지라 하겠고, 벌교는 대외적인 성장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보성이 행정 중심지이기는 하지만 사람 수나 넓이에 있어서는 벌교의 절반 남짓밖에 되지 않으며 먼저 읍이 된 곳도 벌교였다. 오랫동안 벌교는 광주와 고흥을 잇는 국도와 목포와 부산을 잇는 국도가 교차하는 곳으로서 교통 중심지 노릇을 해 왔다.

보성군은 백제 때 "복홀"로 불리다 신라 경덕왕 때부터 보성으로 불려 왔다. 고려 시대에는 한때 "패주"로 바뀌었으나, 다시 보성으로 제 이름을 되찾았고, 이때 "산양"이란 별호를 쓰기도 했다. 옛날 복홀군의 성터는 지금의 미력면 화방리 선인봉 아래인 장골(장동) 일대였다고 한다. 장동 마을 앞 석호산에는 군사를 훈련시키던 연병장과 궁사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석호산 꼭대기에서 겸백으로 가는 닭구재에는 말 달리기를 하였다는 폭 이 미터 정도의 길도 남아 있다. 동학 혁명 때 동학군도 이곳에서 훈련을 했다고 하며, 한일 합방 뒤 의병 대장 안 담산도 이곳에서 의병들을 모아 훈련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모아 보면 보성군의 본래 고을 터는 미력면 화방리 일대였으며, 고려 말께에 들어서 지금의 보성읍 자리로 고을을 옮긴 듯하다. 백제 때 불리던 이름인 "복홀"의 "복"은 소리 빌림 글자로 보이는데 그 소리는 "보성"의 "보"로 남아 지금도 살아 있고, 고려 때 "패주"라 불린 이름에서는 "패"가 지닌 보배의 뜻이 이어져 이른바 "보배로운 고장"이란 뜻의 "보성"이 된 듯하다고 한다.

일찍이 보성 지역에서는 선사 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살았으며 지금도 선사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라 할 만한데 유적 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만 해도 보성군 안에 무려 백사십삼 개의 군집 지역에서 천이백팔십육 기가 발견되었다. 보성의 고인돌은 주로 보성강변의 문덕면과 복내면, 율어면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으며 해안 지역인 조성면 일대에서도 상당수를 볼 수 있다. 또한 주암 댐으로 수몰된 문덕면 덕치리, 죽산리, 봉갑리, 복내면 시천리에서도 백이십사 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고인돌 분포 지역 가운데 특히 율어면 문양리 양지 마을 당산나무 주변에는 모두 육십사 기의 크고 작은 고인돌이 한데 모여 있는데, 고인돌 무리 가운데에 일부는 정자를 지을 때 옮겨진 것으로 보여 옛날에는 더 많은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보성 지역과 관련한 옛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조에 복홀군, 파부리군, 동로현, 분차군, 마사랑현의 다섯 개 군현이 나오는 것이 처음이다. 이 가운데 나머지 네 개의 군현은 복홀군의 관할에 있었던 곳으로, 모두 현재의 보성읍 일대에 위치했던 듯하다. 보성군의 면과 리에 대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은 영조 이십오년(천칠백사십팔년)에 작성된 <여지도서>이며, 여기에는 보성군 지도와 열네 개 면의 이름은 물론 각 면의 호구 수를 남녀로 나누어 적어 놓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행정 구역에 큰 변화를 겪었는데 천구백팔년에 가까이 닿아 있던 낙안군이 없어지고 그 주변의 네 개 면이 새로 보성군에 편입되었다. 그렇게 해서 보성군은 관할 영역이 크게 넓어져서 열여섯 개 면을 품은 군이 되었다.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 하지 말라"

조선 시대에만 해도 벌교는 보성군에 들어 있지 않았다. 본래 벌교는 부사군에 속하였다가 낙안군에 들게 되었는데, 천구백팔년에 이루어진 행정 구역 개편에서 남상면, 남하면, 고상면, 고하면을 합하여 벌교면이라는 이름으로 보성군에 들게 되었다. 그 뒤 다시 천구백이십구년에는 순천 동초면의 연산, 봉림, 회정, 장양, 호동의 다섯 개 마을을 편입시켜 영역을 넓혔고, 천구백삼십칠년에 벌교읍으로 승격되었다. 벌교는 포구를 끼고 있어 일제 시대에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한때 보성과 승주, 고흥 일대 교통 중심지로서 상업이 활발히 일어나기도 했으니 천구백칠십년대까지만 해도 제법 돈이 흔하게 돌아 전라도 안에서 내로라 하는 "주먹"들이 꽤 모여들기도 했다. 흔히 "벌교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옛날 벌교를 품고 있었던 낙안의 본디 중심지는 지금의 벌교에서 낙성을 향해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만나게 되는 고읍리로서 이 마을은 고려 시대 때부터 가까운 주변의 중심지 노릇을 하였다. 옛 읍이라는 뜻의 고읍이란 땅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유서 깊은 고읍리에는, 한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지금은 해제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수령은 육백 년 이상 된다고 하고 높이 사십 미터, 둘레 십 미터 정도이다. 천구백팔십사년 불이 나서 밑동이 타는 바람에 시멘트로 상처를 덮어 놓았다. 불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은행나무는 해마다 두 포대 이상의 은행이 열렸으며, 가을이면 노란 빗발이 내리듯 은행잎 지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고는 했다. 고읍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를 신성한 것으로 여겨 음력 정월 초가 될 때마다 치성을 드리는 풍습을 지켜 왔었다. 치성을 드리는 날 밤에는 마을에서 뽑힌 제관을 빼고는 일체 외출을 금지했다. 마을의 수호신 노릇을 해 온 이 은행나무의 가지는 특효약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수병이 있는 사람이 이 가지를 달여서 먹으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또 자식이 없는 부인은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나무 밑에서 촛불을 켜 놓고 빌었다. 이 은행나무에 불이 난 것도 푸닥거리를 한 뒤에 켜 놓았던 촛불이 원줄기에 옮겨 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천연기념물이었던 나무는 지방기념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읍을 중심으로 낙주라는 고을이 있었으며 낙주에는 고읍을 비롯하여 문발면(지금의 문덕면), 율어면, 조성면, 서면(지금의 외서면), 동강면, 동하면(홍교 부근), 초천면(별양), 낙안면이 속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 마을에서 생긴 강상죄(삼강 오륜에 어긋나는 큰 죄를 말하며, 이 죄를 범하는 사람이 고을에 생기면 수치라 하여 고을을 폐하였다)로 인해 지금의 낙안으로 고을을 옮겼다. 그 뒤, 일제 시대 때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낙안 땅 남쪽에 자리잡은 벌교를 보성군에 넣게 된 것이다. 벌교라는 땅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은 해변 포구의 선착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뗏목다리"란 뜻을 지니고 있다. 옛날 벌교가 속해 있던 "부사"라는 땅이름 또한 "떠 있는 뗏목"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의 벌교읍 홍교 자리에 뗏목다리가 있었다고도 하니, 이래저래 "뗏목다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벌교가 된 셈이다.

벌교읍 들머리인 벌천에 무지개처럼 놓인 홍교는 천칠백이십구년 선암사의 초안 선사와 습성 스님이 본래 있던 뗏목다리(뜬다리)가 홍수 피해로 떠내려가자 그 곳에 세 겹으로 된 돌다리를 놓았는데, 맨 처음 다리를 놓을 때 바닷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십 년도 되지 않아 무너졌다고 한다. 이에 천칠백삼십칠년 다시 다리를 놓았으나 이 또한 바닷돌을 써서 무너져 내렸고, 천칠백칠십팔년 선암사 한월 스님이 다시 놓았으며, 천팔백사십사년에 다시 고쳐서 놓았다. 본래 이 다리는 폭 삼 미터에 길이가 팔십여 미터였으나, 일제 시대 때 순천으로 가는 부용교를 놓으면서 시가지를 발전시킨다는 빌미로 헐어 내어 지금은 이십여 미터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천구백팔십일년부터 사 년여에 걸친 보수 공사 덕택에 일부 원형을 되찾게 된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과 "참고막"

다들 알다시피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아직도 이곳에는 소설 속의 서사적 공간과 숨막히는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숨쉬는 듯 살아 있다. 벌교읍 회정리 산기슭에는 소설에서 몰락한 부잣집으로 나오는 현 부잣집이 폐가가 된 채로 남아 있고, 친일파와 지주들이 숙청을 당하고 좌익 가담자와 그 가족들이 무참하게 희생된 소화다리(부용교)와 빨치산 염 상진이 설을 앞두고 지주들로부터 쌀을 빼앗아 소작인들에게 나눠 주었던 홍교도 여전히 벌교천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밖에도 염 상진의 동생 염 상구가 주먹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땅벌"과 결투를 벌이던 철교와 하 대치의 아버지를 비롯한 양민들이 돌을 날라 쌓은 중도 방죽, 남도 여관과 남 초등학교, 김 범우의 집, 지금은 각기 은행과 농촌지도소로 바뀐 벌교 경찰서와 금융 조합 건물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성군에서는 벌교에 남아 있는 <태백산맥>의 무대와 현장 백여 곳을 테마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라 한다.

<태백산맥>에서 보면, 서울에 머물던 김 범우가 벌교에 내려와 감회에 젖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작가 조 정래는 벌교를 이렇게 표현해 내고 있다. "그는 숨을 들이켤 때 스르르 감겨진 눈을 그대로 감은 채 숨을 토해 내며 고향의 냄새를 음미하고 있었다. 갯내음과 땅내음이 어우러진 그 미묘한 냄새도 고향만이 주는 특이한 냄새였다. 그 냄새 속에는 이상하게도 바람에 갈대 잎 슬리는 소리, 기러기 울음소리 같은 것도 섞여 있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 갯가이면서도 포구가 한정도 없이 길어 정작 바다는 멀리 밀쳐 두고, 민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반원을 그린 산줄기에 그 넓은 낙안벌을 품고 있는 고향은 언제나 두 가지 정취를 함께 느끼게 하는 풍광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렇다. 벌교는 조 정래가 말하듯 갯내음과 땅내음이 어우러진 곳이며, 갯가이면서도 포구가 한정도 없이 길게 펼쳐져 있다. 그 긴 개펄은 <태백산맥>의 유명세만큼이나 소문난 벌교 참고막이 나는 곳이기도 하다. 벌교의 개펄은 대규모 간척 사업의 손길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비교적 옛 개펄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참고막 맛은 워낙 좋아 조선 시대 때 궁중에 진상품으로 올릴 정도였다.

벌교 앞바다인 "여자만"을 따라 펼쳐진 개펄은 서해안의 그것과는 달리 뻘이 사람 키를 넘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크며 뻘 밭의 폭도 넓은 것이 특징이다. 뻘이 깊다 보니 이곳에서는 이른바 "뻘 스키"로 불리기도 하는 뻘판을 타고 나가 고막을 캔다. 철사가 촘촘히 매달린 채취기를 뻘판 옆에 대고 힘껏 밀면 고막이 걸리는데, 이 때 채취기를 털어 함지박에 쏟아 넣으면 된다. 뻘판에 올려놓는 함지박 하나를 다 채우면 무게가 십오 킬로그램 정도는 너끈히 나간다. 뻘밭에 나가면 보통 하루 다섯 시간 가량 고막을 잡는데, 이렇게 하루에 잡는 고막은 쌀 한 포대 분량이고, 뻘판을 타고 이동하는 거리는 오 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뻘밭을 나온 고막은 바닷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 "좋은 놈"과 불량품을 체로 걸러 가려낸다. 흔히 고막은 참고막과 새고막으로 나뉘는데 참고막은 껍데기의 세로 줄이 듬성듬성하고 깊이 파여 있는 것으로 두께도 새고막보다 더 두툼하다. 새고막은 수심 일 내지 육 미터 정도의 바다에 사는 반면, 참고막은 개펄에 묻혀 있다. 새고막은 바다에 그물을 내려 거기에 고막이 달라붙으면 끌어내는 방법으로 잡지만, 참고막은 개펄에 달라붙어 있으므로 하나하나 손으로 캐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새고막보다 참고막 값을 훨씬 더 쳐주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물론 맛도 참고막이 훨씬 더 고소하고 담백하다. 그런 까닭으로 벌교에서는 상대적으로 새고막이 푸대접이다. 오죽하면 새고막을 "똥고막"이라 했을까.

 

세 가지 경치와 세 가지 보물이 있느니

옛날 벌교읍 징광리 존제산 동쪽 계곡에는 징광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절터와 함께 주초석과 석재, 도자기 조각들만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징광사는 한때 선암사를 넘어설 만큼 규모가 큰 대가람이었고, 정유재란 때 불에 탔으나 다시 중창하여 십칠 세기 중반에는 이곳에서 많은 불교 서적을 펴냈다고 한다. 하지만 십구 세기 말에 이르러 완전히 폐사가 되었으며 사람들이 그 절터 위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간직한 징광리에서 요즈음에는 방짜 유기와 재래식 옹기를 함께 만날 수 있다. 중요 무형 문화재 칠십칠 호로 지정된 한 상춘 씨는 이곳에서 전통수법인 방짜 제작 기술로 옛날식 그대로의 유기를 재현해 내고 있는데, 이는 하나하나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는 일이다. 방짜 유기는 순수한 구리와 주석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한 상쇠를 불에 달구고 두들기고 여러 번 궁글리기를 거듭하여 만들어 낸다. 따라서 여기에서 만드는 방짜 그릇은 공장에서 기계로 대량 생산한 여느 유기들과는 뚜렷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투박한 멋을 풍기는 전통 옹기도 이곳 징광에서 만날 수 있는 볼거리다.

보성 사람들은 자기네 고장을 일컬어 "삼경, 삼보향의 고장"이라고 한다. 삼경이란 산과 바다와 호수를 말하며, 삼보향은 의향, 예향, 다향을 가리킨다. 보성군에는 임금 "제"자가 들어가는 산이 모두 세 개가 있는데, 웅치에 있는 제암산, 율어에 있는 존제산, 벌교에 있는 제석산이 그것으로 삼경 가운데 첫 번째 경치가 바로 이 세 개의 산이다. 두 번째 경관은 득량만과 여자만의 청정한 바다와 그곳에서 나는 온갖 해산물이고, 세 번째로는 보성강의 본줄기와 갈래 물줄기가 모인 주암호의 풍광을 꼽는다.

보성의 삼보향 가운데 의향이라 함은 예부터 보성에서 의로운 인물이 많이 났음을 뜻한다.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첫 번째로 궐기하여 여러 문인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아 싸웠던 박 죽천 선생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손수 싸움에 나섰던 안 방준,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손 응호, 충무공에게 왜군을 무찌를 비책을 일러 준 안 중묵, 왜군과의 전투에서 늘 붉은 옷을 입고 선봉에 나서 "홍의 장군"이라 불렸던 소 상진, 권 율 장군을 도와 행주 대첩을 승리로 이끈 선 거이 장군, 천구백오년 을사 보호 조약 체결에 분개하여 항일 투쟁에 뛰어든 이후 대종교를 만들어 포교를 통해 독립 운동에 힘썼던 대종교 교조 나 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의병을 일으켜 수많은 왜병을 무찌른 안 규홍, 독립 신문을 창간한 서 재필, 천구백십구년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김 구 선생과 함께 그 해 시월 삼십일일 상해 임시 정부 주관으로 제이의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박 문용 열사 들이 보성이 낳은 의인들이다.

의향에 이어 보성을 예향으로 꼽는 첫 번째 까닭은 판소리 "서편제"의 시원지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남도의 독특한 가락인 서편제는 강산 박 유전 선생이 창안해 낸 창법으로, 음색이 맑고 높으며 애절하고 감상적인 것이 특징이다. 박 유전은 천팔백삼십오년 순창에서 태어나 어릴 때 지금의 보성군 보성읍 대야리 강산 마을로 이주해 살았는데, 어려서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가 되는 바람에 주변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그러나 담 너머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윽고 웅치면 용추 폭포에서 덜미소리(목덜미 소리를 크게 내 우는 듯한 소리), 활성산에서 새 소리, 제암산 임금바위에서 귀신소리를 터득하여 온갖 소리를 섞은 새로운 계면조 창법을 개발하여 천팔백육십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전주 대사습회에 나가 <심청가>를 불러 장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전라 감사의 주선으로 대원군을 만나 운현궁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이의 소리를 들은 대원군이 "네가 천하 제일 강산이다"라고 찬탄하면서 "강산"이란 호와 무과 선달의 첩지를 내리고 애꾸눈을 가릴 수 있도록 오수경이라는 안경까지 내렸다. 귀향한 박 유전은 이후 나주와 보성을 오가며 제자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으니 이 날치, 정 재근과 같은 명창을 길러 내었다. 소리로 해가 뜨고 소리로 달이 지던 그 시절, 그이가 자란 강산리에서는 판소리 두어 대목 못 하는 이가 없었고, 지금도 강산리 노인들은 판소리 한 대목쯤은 구성지게 뽑아 낼 줄 안다.

 


"내 소리 받아 가라"

천구백육년 박 유전 선생은 슬하에 혈육 한점 없이 세상을 떴는데, 그이가 죽은 뒤 사흘 동안이나 밤마다 마을 뒷산에서 "내 소리 받아 가라"는 혼백의 외침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박 유전의 소리맥은 정 재근에 이어 정 응민에게서 다시 한번 화려하게 꽃피게 된다. 보성소리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는 송계 정 응민은 천팔백구십육년 회천면 영천리 도강 마을에서 태어나 동편제와 서편제를 가미한 새로운 소리제인 강산제, 곧 "보성소리"(강산제)를 창제해 무수한 소리꾼들을 보성소리로 끌어들였다. 그이의 창법은 다시 아들인 정 권진을 거쳐 국창 조 상현, 조 통달, 성 창순 선생과 같은 무수한 명창들에게까지 연연히 전승되고 있다. 사 대째 소리맥을 잇는 보성 회천의 옛 소리터에서 낳은 인간 문화재급 명창만도 십여 명이나 된다. 애당초 박 유전이 보성의 산과 물에서 서편제 소리를 얻었듯, 서편제를 잇는 보성소리 또한 보성 땅 산천 정기의 품에서 실 타래처럼 풀려 나온 것이다.

의향과 예향에 이어 보성을 다향이라 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차 재배지이기 때문이다. 예부터 보성에서는 문덕면 대원사 주변에 차나무가 많았다고 하며, 지금도 이곳에는 야생 차밭이 삼천 평 가량 무성히 우거져 있다. 이 밖에도 복내면 당촌. 벌교읍 징광사 터 주변, 보성읍 자원사 절터, 득량면 송곡에서 조성면 귀산에 이르는 산자락에 많은 야생차가 자라고 있으니 일제 때와 광복 뒤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재배 차밭이 아니더라도 차나무는 보성에서 매우 흔했다. 이곳에 재배 차가 생긴 것은 천구백사십일년 일본인 소유의 경성 화학 주식 회사가 보성읍 봉산리에 "베니호마레"라는 인도산 품종을 가져다 삼십 헥타르에 이르는 차밭을 조성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광복이 되자 십이 년 동안 이 차밭은 그냥 버려져 있다가 천구백오십칠년 대한 홍차 주식 회사가 사들여 개간하기 시작했다. 국산차의 수요가 늘어가자 정부에서는 천구백육십구년 차밭 조성을 농어민 특별 사업으로 채택하였는데, 이에 보성 다업 조합이 생겨나 "야부끼다"라는 일본식 신품종 차밭을 널리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성읍에서 율포 해수욕장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활성산 기슭에 녹색 카펫을 깔아 놓은 듯 구비구비 진초록 차밭이 펼쳐진다. 이곳에 차밭이 이렇게 많이 들어서게 된 것은 차 재배에 적합한 자연적인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차나무는 날씨가 따뜻하고 강우량이 천오백 밀리미터 이상이라야 잘 자라는데, 이곳은 강우량이 약간 모자라기는 해도 아침 저녁으로 끼는 안개가 모자란 강우량을 대신하여 차 재배에는 아주 적합한 곳으로 꼽힌다.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만나는 곳에서 많이 생기는 안개가 차의 생장에 더없는 자연적 혜택을 가져다 주는 셈이다. 본래 차나무는 해양성 기후에 알맞은 식물로, 한 잎의 차가 생산되기까지는 무려 칠 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다. 보통 찻잎은 오월부터 따게 되며, 해마다 찻잎을 따는 오월이 되면 보성군에서는 차의 풍작을 비는 다신제와 더불어 다향제를 열고 있다.

 


이곳의 진짜 맛이란

보성군에 온 이상 삼경과 삼보향을 만나지 않고는 보성군을 보았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들을 고루 만났다고 해서 보성을 다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보성 나들이는 삼경과 삼보향을 접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잘 알려진 문화재나 떠들썩한 구경거리보다 훨씬 소중한, 투박하고 애잔한 보성 사람들의 삶을 걸음 딛는 곳에서마다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시고 떫은 맛을 조용히 씹어 넘기며 견뎌 온 이곳 사람들의 살가운 사연들이 실없이 웃어 주는 그네 얼굴의 자디잔 주름살이며 길섶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스며 있어 이곳이 고향이 아닌 사람이라도 어디에서 발길을 멈추든 고향처럼 정겨운 느낌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 가 볼 일이다. 참고막 같은 짭짜롬한 남도 사투리를 따라 보성 땅 그 어디든.

 

"숨쉬는" 항아리
보성 땅에는 이름난 옹기 굴이 두 군데 있다. 징광 옹기와 미력 옹기가 그것이다. 징광 옹기는 벌교읍 가까이에, 미력 옹기는 보성읍 가까이에 있다. 징광 옹기나 미력 옹기나 마찬가지로 "광명단 유약"이 아닌 천연 유약을 발라 굽는다. 이곳 옹기 굴에 있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광명단 유약이란 일제 때부터 쓰기 시작한 납 성분의 유약으로 요즈음 볼 수 있는 거개의 옹기가 이것을 발라 구운 것이다. 광명단 유약을 발라 구우면 낮은 온도에서도 옹기가 단단히 익어 생산성이 높고 윤기가 반들반들하게 잘 나는 들 해서 여러 가지로 생산이 손쉽게 되지만 옹기가 가진 본디의 기능을 다 못 한다 하는데 그 기능이란 "숨을 쉬는 것"이다. 천연 유약을 발라 옛날식으로 만든 옹기는 안팎으로 뚫린 미세한 구멍을 통해 들숨과 날숨을 쉬어 음식의 조화로운 숙성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 광명단 유약 대신 뒷산에서 채취한 약토와 부엽토, 나무와 잎을 태운 잿물을 쓴다. 옛날 방식인 쳇바퀴타래 기법(흙덩이를 판자처럼 길게 늘어뜨려 그릇의 틀을 만드는 방법)을 고수하고 있으며, 가마도 전통적인 "뺄불통" 가마를 쓰고 있다. 이 가마는 경사 이십오 내지 삼십 도의 나지막한 언덕 구릉 위로 이십삼 미터 정도 길게 비스듬히 치켜 쌓아 불길이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만든 것인데, 처음 며칠 동안은 사십 내지 오십 도의 "피움불"로 시작해 백 도 정도로 점점 온도를 높여 "돋굼불"로, 다시 구백 도 정도의 "베낌불"에서 천이백 도까지 온도가 올라가는 "큰불"을 때 준다. 이렇게 하여 가마 속에서 옹기가 발갛게 익게 되면 삼 일 정도 열기를 식힌 뒤 끄집어낸다. 하지만 이런 정성에도 가마에 넣은 옹기 가운데 절반 가량은 버릴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갈라지고 터진 옹기가 생기는 것이다.


옥전리의 대금 노인
벌교읍 옥전리에는 삼십 년 가량 대금을 만드는 일에 매달려 온 강 영재 노인이 살고 있다. 옛말에 이르기를 대금은 소리 내는 데 십 년, 음 잡는 데 십 년, 익숙해지는 데 십 년, 그래서 합하여 삼십 년이 걸린다고 했다. 대금을 불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이야기지만 대금을 만들기도 그와 마찬가지로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먼저 대금의 가장 주된 재료인 대나무를 고르는 일부터 각별히 까다로운데, 옛말에는 해묵은 황죽이 좋다고 전해 내려오지만 지금은 살이 두껍고 단단한 쌍골죽을 으뜸으로 친다. 그러나 이 쌍골죽(양쪽에 골이 파인 대나무) 찾기가 산삼 구하기만큼이나 만만치 않다. 강 노인은 쌍골죽을 찾느라 전국에 안 가 본 대밭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몇천 군데 대밭을 뒤져도 한두 뿌리 나올까 말까 한 것이 쌍골죽이다. 그렇게 모은 대나무를 소금물에 담갔다가 말린 다음 깨끗이 다듬어 대금 만들기에 들어간다. 작업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대 중앙에 여섯 개의 지공을 뚫는 작업인데, 일 밀리미터만 틀려도 옆으로 비껴 틀어져 버리고 만다. 이렇게 하나의 대금을 만드는 데는 약 사십여 일 정도가 걸린다. 지금도 그이는 일흔 살 나이를 잊은 듯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대금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한번 대금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면 일을 마칠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도 않는다. 그이의 대금 사랑은 어찌나 지극한지 잠자리에서도 대금을 껴안고 누울 정도라 한다.


<샘이깊은물> 
출처 : 득량의 소리...
글쓴이 : 고시펭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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